전망들

일단 개라고 불러 봐.

새 수첩의 첫 페이지에 적은 문장이다. 어디서 본 것인지, 꿈에서 들은 말인지, 누군가 일러줬던 이야기인지, 일러준 이가 있었다면 그이는 심리 상담사였는지, 꿈속의 마녀였는지, 스님이었는지, 점쟁이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일종의 주술이나 부적 같은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개라고 불러 봐. 개라고 부르면 눈 쌓인 비탈길에서 미끄러지듯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두려움을 다루는 방법으로만 두려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은 어떤 공포와도 다른 방식으로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 하고 불러 봐. 이리 오라고 해봐. 개라고 불리는 것에게는 이리 오라는 명령어가 보들보들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개라고 부르면 그것을 이쪽으로 옮기기 쉽기 때문이다. 저쪽으로 보내기도 쉽기 때문이다. 이쪽도 저쪽도 곁이라고 믿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다고 해서 그걸 볼 수는 없다. 볼 수 없는 것을 믿을 수도 없다. 그래도 일단 개야, 하고 한번 불러 봐. 개야, 개야 부르고 나면 배가 고픈지 나가서 좀 걷고 싶은지 고구마 먹고 싶은지 깨끗하고 푹신한 이불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잠들고 싶은지 궁금해진다. 목소리를 둥글게 말아 굴리듯이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개라고 부른 것이 기다리는 것을 구해와 입에 넣어주면서 까진 뒤꿈치나 벌겋게 얼은 발 퉁퉁 부은 다리를 다 잊게 된다.

눈을 밟으며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하는데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바닥에 쌓인 눈도. 보이지 않는 것을 밟을 수는 없었다. 쌓이지 않는 함박눈 속에서 바닥을 갖지 못한 눈 속에서 일단 개라고 한번 불러 봐.

개야, 산책을 가겠니? 무슨 냄새가 나니? 개를 부르면, 눈 냄새를 맡으려는 개가 있으면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눈밭을 헤치며 걷고 폭설에 파묻히며 걷고 우리를 파묻고 있는 것을 눈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개와 함께인 자는 누구보다 간절히 바닥을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공포의 깊이를 완성하기 위해 발생하는 바닥과 개의 본성을 위해 빚어지는 바닥은 완전히 다른 물질이 되기 때문이다. 동음이의어처럼. 개, 바닥이라는 단어를 해맑게 다루는 개를 불러 봐. 개는 두드릴 때마다 생겨나는 문을 만들듯이 코로 땅을 두드리며 걷는 짐승이기 때문이다. 그런 동물을 위해 열리는 문에는 내재한 빛이 있고 빛이 비출 장면이, 장면을 위해 동원된 산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내가 개라고 부르는 것과 함께 걷는다. 눈이 푹푹 날린다. 개라고 불리는 것의 발바닥과 접하는 곳에 푹신하게 눈이 쌓인다. 눈이 가짜여도 계절은 진짜인지, 계절이 허구여도 눈은 사실인지. 개의 발바닥이 차게 젖는다. 눈 쌓인 개의 등은 차갑고 푹신하다. 개를 위하여 나는 체온을 가진다. 부를 개가 있어 나는 눈 속의 짐승을 구조하듯이, 구름을 끌어내리듯이 먹을 것과 이불을 안고 돌아올 수 있다. 내가 돌보는 것을 개라고 부르며, 개를 먹이고 이불 위에 누이며 안고 있던 것들을 다 잊는다. 개가 젖은 몸을 털 때 허공은 흩어진다.

너를 개라고 불러도 될까. 개, 부르면 너의 보송보송한 귀가 북슬북슬해진다. 그건 어두컴컴한 숲에서 처음 본 버섯갓처럼 빛나고 만져보면 정성껏 발효시킨 반죽처럼 부드럽다. 내 손바닥에서 옮겨가는 온도가 원래 너의 것이었던 것 같다. 손가락 사이에서 점점 더 부들부들한 귀가 된다. 내 말을 다 듣고 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개야, 하고 아무리 멀리서 불러도 그 자리들을 다 곁으로 만든다. 개야, 불러도 개를 볼 수는 없고 아무것도 없는 빈 어둠을 보는 동안 개는 내 공포의 냄새를 맡는다.

개를 부르며 눈을 한번 떠 봐. 눈앞의 어둠을 더듬으면 그것은 털이 많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나의 이마를 간지럽힌다. 연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투명성을 택한 것들. 개는 그런 것의 냄새를 맡는다. 우리는 애틋한 어둠을 이마로 밀어내며 걷는다. 개, 사실은 너를 개라고 부르고 싶어 부끄럽다. 말하면 개의 빈 눈동자가 무슨 이해라도 했다는 듯이 나를 본다. 눈동자. 여기엔 아무것도 없고 보여줄 것도 비출 것도 없다는 듯한 매끄러운 표면. 나의 부끄러움만을 깨끗하게 비추는 반사성 표면. 그걸 일단 개의 눈이라고 불러 봐.

너는 일단 개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눈 쌓인 비탈길에서 미끄러지듯 사랑한다

기우뚱한 눈길에서 미끄러져 도착한 장소

네가 보는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면

볼 수 없는 것과 보이는 것이 없음을 구분할 수 없다면

그래도 일단 개라고 불러 봐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둠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개가 깨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잘 깨지는 개 앞에서 어둠은 부드럽게 우글거리기 때문이다

네가 부른 개

허공에 정면을 만들며

만든 정면을 킁킁대며 걷는다

바닥 냄새가 나는 것처럼 바닥을 디디며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투명하지 않아도 안전할 수 있다는 듯이

너는 일단 개를 부른다

개, 이리 와.

돌아오는 개의 얼굴에 시간이 잠시 맺힌다